[에세이- 눈이 내리는 날에 자기 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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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미래와희망 작성일2017-12-20 조회2,435회본문
우리가 같은 곳을 볼 때, 그 때 우리는 우리 서로를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느낄 수 있죠.
우리가 같은 생각을 할 때, 그 토대위에 우리는 말 할 필요 없이 서로를 압니다.
그렇게 우리는 느낄 수 있죠.
늘 문제는 우리가 다른 생각을 하면서 서로 바라볼 때 생겼습니다.
그 때도 우리는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어주기를 바라는 것은 믿음 자체로 해결될 수 있다는 헛된 믿음에서 비롯되곤 하지만
믿어준다고 해서 사실 자체가 달라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기에
현실은 추운 겨울 호숫가의 얼어붙은 얼음과 같이 언젠간 부서질 날만 남은 허상일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망각이라는 효과적인 지우개와 용서라는 아름다운 희생을 무기로 지니고 있습니다.
스스로의 주관적 세계 속에서 판단하고 사는 나머지, 타인에게 상처를 준 것은 인지조차 못하고, 별 일 아닌 것에는 큰 자책의 회초리를 휘두르며 사는 오늘의 우리는 한 해가 다 저물어가는 춥고도 스산한 이 한해의 끝자락에 서서 또 한 번의 다음 해를 기다립니다.
한 때는 많은 사람들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친구인 줄 믿은 것이겠죠.
친구의 의미조차 알지 못하는 채 사람들의 이름과 헛되고 헛된 자리들만 허공에 부유하는 수 많은 시간들이 흘러갔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많은 실수와 헛된 약속들이 과거로 흘러갔는지 조차 알 수 없는 오늘, 돌이켜 생각해 봅니다. 사람이 사람을 알아봐준다는 것에 대해. 그 사람의 가치와 상관없이 지나간 삶과 고통의 시간을 인내한 용기와 그러나 이내 알아버린 비겁함과 습자지보다 얇은 지식의 깊이 마저도 그 사람 자체로서 인정하고 곁을 준다는 것. 그럴 수 있는 사람을 우리는 친구라 불러야 마땅합니다.
내가 그런 사람이 되기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나, 되려고 내 년에는 노력이라도 해보아야 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을 친구로 가진 사람은 그래서 늘 부럽습니다.
또한 같은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동시대의 보편적인 가치관을 지키며 사는 부부 역시 가장 아름다운 친구 사이라 감히 말해볼 수 있겠습니다.
별이 북극성 사이로 빛나고, 툰트라 얼지 않는 저문 땅의 한기가 하늘의 구름과 한 방울 수증기까지 끌어모아 마침내 가장 얼음 두꺼운 곳으로부터 바람과 눈이 같이 불고 내립니다.
그 눈은 하늘을 가리고 세상을 가리고 내 마음속에 쌓여 흔들립니다.
내일은 다시 눈은 그치고 햇살을 느낄 수 있을까요?
알 수 없지만 언젠가 그 날이 온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압니다.
눈이 그친 세상이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을 수 있지만, 기다림과 그리움은 아름다운 것과 아름다운 사람만을 위한 것은 아닌 까닭에 나는 오늘도 , 내일도 다음 시간들을 생각해 봅니다.
나의 내일과 내년과 멋 훗날은 나의 바람과 달리 다가올지도 모릅니다.
집착의 고리를 끊는 것만으로도 해탈이라고 합니다.
생각의 고리가 무한히 이어지면 집착이 된다고 합니다.
생각은 또한 객관적인 것이 재료이지만도 않습니다.
상황이 생각을 만들어 냅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어떤 일도 만들지 않겠지만 상황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까지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생각은 필연입니다.
즉, 살아있는 동안 무엇인가 발생하고, 그 것에 대해 생각하고, 판단하고 다시 행동하면 상황들의 연쇄고리가 무한정 이어지고, 이 고리의 일부가 엉키면 우리는 당황하게 되는 것이죠.
‘난마’ 라고 부르기도 하는 이 엉킨 부분으로 생각이 집중되면 집착이라는 결과물이 만들어 질 때가 있습니다.
집착적 사고는 최악의 상황을 상정하여 부정적으로 흘러갈 때 파괴적 성향을 드러내게 되고, 결과는 참으로 좋지 않습니다.
고리 끊기.
우리는 또 하나의 효과적인 무기를 다 가지고 있습니다.
지나간 과거의 어느 날, 죽을 만큼 힘들었던 기억. 해결되었던 그렇지 못했던 그 과거를 딛고 선 현재의 나.
그 순간들을 살아낸 힘으로 오늘의 작고 큰 수많은 일들과 상처를 이겨낼 수 있지 않을까?
우리가 올지 안 올지도 모를 내일과 미래를 미리 생각속에 살면서 걱정을 해야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
미래를 대비하는 것과 극한의 상황과 패닉을 선경험하는 것이 같은 의미일까?
심리학자 아들러의 이야기처럼 우리는 오늘을 살아야 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과거를 넘어 오늘을 살며, 내일은 주어진 자의 몫이니 겸허함을 더 공고히 해보려 합니다.
이러한 주제를 이야기하기에 나의 이 나이는 적을까요? 적당한 나이가 있는 것일까요?
더 살아보았어야 할까요?
최소한 오래 지나 다시 이 글을 읽을 때 스스로가 스스로의 글 속에서, 과거의 자아가 현재의 나에게 쓴 조용하고 소중한 자기 성찰만 되어도 족하리라 생각해 봅니다.
더 나이 먹은 내가 웃으면서 끄덕인다면 “우리” 는 부부요, 친구요, 형제요. 부모일 수도 있지만 “자기자신”일 수도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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